평강의 하나님이 – 빌립보서 4:6-9
- 본문
-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 빌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평강의 하나님, 이 시간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시어서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풍성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서론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은, 그 때는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을 통한 보람이 있어, 그 어려움을 이기고도 남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는 다시는 낳지 않겠다고 하다가도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또 아이를 갖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말로는 힘들어 죽겠다고 하면서도 들어오는 수입이 많으면 즐겁게 그 일을 합니다.
예전 회사를 다닐 때 잔업이 있어서 밤 늦게 회사에 다시 가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원이 아무도 없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사장님이 혼자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댁에 들어가 쉬셔야지 어쩐 일로 이렇게 나와서 일을 하고 계시냐고 물어봤더니, 그게 쉬는 거라로 했습니다. 직원이었던 저는 피곤함에 투덜거리며 회사에 들어가는 그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는데, 사장님은 그 일이 쉬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이게 오너와 직원의 차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저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저의 올해 요절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요절로 삼게 되었던 작년말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잠깐 나누고 싶습니다. 아주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업무가 폭주하는데, 문제는 그 업무가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가치나 보람이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일들도 많은데 별 가치도 없는 일이 쓰나미처럼 몰려들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무척이나 피폐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몇 날을 보냈고, 아직도 처리해야 할 리스트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밤 10시 정도가 되었는데, 마침 다음날 아침에 일대일성경공부가 있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모든 일을 접어놓고 성경공부 준비를 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미리 정리된 노트도 있었지만, 스트레스가 머리 끝까지 차 있었기에 성경 말씀으로 정화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마침 성경공부 주제가 ‘기도’였고, 오늘 이 말씀이 암송구절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암송구절부터 확인해 봐야겠다 생각하며 6절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암송했던 말씀이고, 이 말씀에 대한 찬양도 있어서 자주 부르곤 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한 글자, 한 단어가 암막으로 덮혀 있는 것처럼 읽고 있는 그 다음 단어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6절 말씀 끝부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고 7절 첫부분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까지 읽었을 때 머릿속에서는 이런 문장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래,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리라”, “지금 나를 뒤덮고 있는 이 스트레스를 하나님이 모두 다 치워버리고, 나로 평안한 결과를 얻게 하실거야…”
그런데, 여러분 그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이웨이에서 출구로 나가야 하는데 나가지 못해서 점점 벌어지는 그 길을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경험이요. 제가 딱 그 느낌이었습니다. 내 머릿속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제 눈에 들어오는 다음 구절은 그것과는 점점 벌어지는 다른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아니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어야지, 내 마음과 생각을 왜 지키시지??? 그리고 나서 좀 정신을 차리고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 맞는 말은 맞는 말이네. 지금 내 마음처럼 이렇게 복잡하면 안 되지. 마음과 생각을 잡아야지.” 그리고는 그 다음 구절이 궁금했습니다.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 후에는, 그럼 이제 일이 풀리는 거겠지? 그런데 다음 구절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말씀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생각, 내 바램과는 참 많이 다른 하나님의 말씀에서 큰 은혜와 도전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제게 인생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열게 하는 귀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오늘 그 은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본문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
6절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로 시작합니다. 본문의 주제는 분명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필요한 것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런 예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마을 중앙에 우뚝 선 아름드리 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떤 큰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던 나무가 시름시름 말라 죽게 된 것입니다. 그 원인은 그 나무 속을 파먹고 살고 있던 벌레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근심, 염려는 바로 이 나무 속을 파먹고 있던 벌레와 같습니다. 외부의 시련을 잘 버텼던 사람들이 내부의 근심과 염려로 무너지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갈멜산 전투에서 바알과 아스다롯 제사장들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던 엘리야 선지자도 다음날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여달라고 하였습니다. 염려는 별게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와 같이 사람을 속에서부터 무너뜨립니다. 이 염려가 사단의 가장 큰 무기인 ‘죽음’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을 향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들도 먹이시고, 들풀도 입히시는데 우리는 그 새들보다 더 귀하다고 하시며,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염려’의 다른 이름은 ‘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그 날 먹을 것만 거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며칠 먹을 분량을 거둡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일 만나가 내려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내일에도 내려주겠다고 했던 그 말씀을 의심했던 것이고,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염려’, ‘근심’의 본 모습은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상황에도 걱정하는 것을 ‘금지’하고, 느껴지는 불안을 ‘억제’하라는 강한 경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한번 안하고 말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뜨리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단의 술수에 넘어지지 않기 위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1990년대 뉴욕시장이었던 ‘줄리아니’는 ‘경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무관용 정책’과 ‘깨진 유리창 이론’을 적용해 경범죄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전문가들도 그를 중범죄와는 싸울 용기가 없어서 짜잘한 경범죄만 단속하는 겁쟁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경범죄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며 경범죄가 줄어들자 중범죄율도 함께 낮아지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창고의 수많은 유리창 중 하나가 깨져 있으면 사람들이 쉽게 다른 창에 돌을 던진다는 것이 ‘깨진 유리창 이론’입니다.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무너지면 큰 것도 쉽게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삶의 염려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으로 자라고 결국 불신앙으로까지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염려가 생길 것 같으면 얼른 고개를 흔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6절 앞 부분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면, 9절까지는 해야 할 것 세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 첫번째는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6 …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여기서 ‘하나님께 아뢰라’는 단어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알려지도록 하라’라는 뜻입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알려지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내 상황, 마음 상태, 바라는 것 등을 수시로 이야기해서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교를 다녀온 자녀들이 엄마, 아빠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남녀가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진 후에도 밤새도록 셀폰을 붙들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친밀하게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이야기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염려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염려와 기도의 비중이 어떻게 되십니까?
본문은 기도의 요소에 대해 또 한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건 ‘감사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좋은 결과를 보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과를 보기 전에 기도할 때 감사함으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무얼 보고 감사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기도한 대로 들어주실 것이니까 미리 감사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감사할 것은 이어지는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7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센스가 있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좀 지난 영화인데 ‘일곱가지 유혹’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코메디 판타지 영화인데요, 한 여인을 사랑해서 그의 마음을 얻고 싶어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악마와 일곱가지 소원과 그의 영혼을 맞바꾸는 계약을 하자고 합니다. 그 남자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그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소원들을 이야기하는데 그 소원들이 모두 비틀린 결과로 나옵니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했더니 정말 부자가 되었고 그 여인은 자신의 아내가 되었는데, 알고보니 멕시코의 마약왕이어서 곧 체포되었고, 더군다나 여인은 정원사와 애인관계였습니다. 훌륭한 대통령이 되어 여인을 감동시키려 했는데 암살당하기 직전의 링컨이 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악마는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다고요.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다행히도 우리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실, 무엇을 구하는지 잘 모르고 구하기도 합니다. 정말 내가 말하는 대로 다 이뤄지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위의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잘못 구하지 않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해서, 문구 하나 하나를 따져보고 문제거리가 없는 완벽하게 만든 문장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 로뎀나무 밑에 쓰러진 엘리야 선지자처럼 낙망하고 지쳐서 기도 소리가 나오지 못하고 신음소리만 내고 있는 상태라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기도하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았다고 이야기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못 구하고 있어도, 우리가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어도 그분은 우리를 감찰하셔서 진짜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다 보면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키는 일도 잘 못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딱 시킨대로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내가 시킨 일 뿐 아니라 그로부터 발생하게 될 그 다음 스텝까지 꼼꼼히 따져서 일을 완벽히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뛰어나다’라고 하는 말씀은 상대적인 우월성이 아닙니다. 초월적인 우월성, 절대적인 우월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조잘조잘 나의 마음과 상황을 다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다 말하지 못한 부분, 내가 미쳐 알지 못한 상황까지도 하나님은 감찰하셔서 응답을 주신다는 것, 그리고 그 응답이 내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고, 완벽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는 자세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그래서 히브리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분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이런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 기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마치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구한 뒤 평안히 돌아가고 수심이 없었던 것같은 평강이 임합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도단 성을 아람군대가 포위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아람군대의 공격이 번번히 막혀서 아람왕이 혹시 첩자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자, 신하들이 엘리사 선지가가 아람왕의 침실에서 하는 이야기까지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준다고 보고를 합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를 먼저 잡으려고 그가 머물던 도단 성을 포위한 것입니다.
아침에 사환이 일어나 그 포위한 군대를 보고 두려워하고 있으니, 엘리사 선지가가 그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고, 그 사환은 그 아람군대를 둘러싼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군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환은 두려워 했고, 그 군대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 선지자는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 봅니다.
따르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버리자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은 제자들의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일까요?
눅 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누가복음 24장 36절, 요한복음 20장 19절과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표현이 단순히 ‘안녕하세요’라고 하는 우리의 평범한 인사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정말 그 상황에서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것,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시던 것이 바로 ‘평강’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전쟁 중에 있는 파수꾼처럼 적의 동태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요새로 보호하시는 것처럼 걱정과 두려움의 공격으로부터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자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앞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해서 염려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겨울에 집안으로 외풍이 스며들어 오는 것처럼, 한 여름에 문을 꽁꽁 닫고 에어컨을 켜고 있는데도 어디선가 나타난 파리가 욍욍 날아다니는 것처럼 염려와 두려움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위협으로부터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본문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6장에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애매히 고소를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원통함, 또 다음 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찬송을 합니다.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렸고,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은 그 당시 엘리트 집단에 속했던 간수가 하나님을 믿게 되는 전도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해 가고 있을 때 유라굴로 폭풍을 만나 다 죽게 된 상황에서 지난 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다면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지금 이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상황은 또 어떻습니까? 로마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로마의 기독교 핍박의 한 가운데서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 ‘평안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인간의 평정심, 셀프 컨트롤로 가능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시는 ‘평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골로새서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우리는 ‘평강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염려를 위해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생각’은 우리의 내면 전체, 전인격을 의미합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저희를 흔들어서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끊임없이 공략합니다. 약해지지 마십시오. 강하게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붙들고 계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힘만으론 그 사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껏 100년 밖에 못 살지만 사단은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대적하면서,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의 약점을 관찰하며, 그에 대한 빅데이터를 쌓아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TV 광고에도 쉽게 유혹되는 존재인데 어떻게 그 사단의 공략을 버텨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 두번째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8절에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할만 한 것, 칭찬할만 한 것, 덕을 끼치는 것, 기림 즉 칭찬할만 한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 세상과 교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빌립보서 3:19에는 ‘그들의 신은 배’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이 자신의 배, 즉 자기만족이란 뜻입니다. 세상은 오직 자기만 생각합니다. 자기만 잘 되면 옆 사람이 죽어가도 괜찮습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JOY 선교회’라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JOY, 기쁨은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rself Third로 추구할 때 온다는 의미였습니다.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내 주변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도 너무 많습니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도 너무 많습니다. ‘우울증’은 이제 감기의 수준으로 보편화 되었습니다. 멀리 전쟁과 탄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손을 펼쳐 닿을 수 있는 거리에도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해야 합니다.
해야 할 것 세번째는 ‘행하는’ 것입니다.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
무엇을 행합니까? 빌립보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이 모든 것은 ‘말씀’,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성경과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말씀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수 때에는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물은 사방에 가득한데, 실제로 내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이 머리 속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머리에서만 머물지 않고 가슴으로 내려와 내 마음을 태우고, 그것이 손과 발로 내려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때 비로소 그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9 …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9절에는 또 한번의 약속이 나옵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위에 7절에서는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했고, 9절은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4절 가운데 순서를 바꾼 ‘하나님’과 ‘평강’이라는 단어가 두번 등장합니다. 그래서 성경 앱에서 ‘평강’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셀폰에 성경 앱이 설치되어 있는 분들은 한번 검색해 보십시오. ‘평강’, ‘평화’, ‘Peace’라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이 나오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몇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민수기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 즉 제사장에게 백성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사명은 우리에게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평안’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평강’을 위해 우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새 벌써 10월 중순입니다. 12월 성탄절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밤에 밖에서 양떼들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천군 천사의 찬송이 이어집니다. 그 찬송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의 평강을 위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평강을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 ‘평강’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아시겠습니까?
평강은 주로 ‘관계’의 측면에서 이야기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을 추천합니다. 명상은 ‘마음의 평온과 집중을 위해 내 마음 깊은 내면 속으로 들어가, 자기 성찰과 자기 인식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명상의 잇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심지어 자기계발 관련 책에도 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시인이 이야기한 것과 같이 “내 마음은 ‘호수’”입니다. 제가 수영을 못해서 감히 꿈꿔보지는 못하지만, 바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매력이 있는 것이 ‘바다 속의 그 고요’입니다. 해수면에 풍랑이 일어도 조금만 들어가면 고요하다고 합니다. 내 안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헤매지 마시고, 하나님의 그 심연을 누려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힘만으론 염려와 걱정,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아뢰고,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하며, 말씀을 통해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여, 우리 가운데, 또 관계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을 늘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저희 마음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는 평강의 하나님, 저희는 연약합니다. 항상 넘어집니다. 저희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시고, 위로부터 하나님의 평강을 주시옵소서. 저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저희 안에 두셨던 그 아름다운 소명을 다시 불 일듯 일으켜 주셔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 시대를 위해 쓰임받고, 이 땅에서의 모든 사명을 마치고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